요트잡담

OK딩기....내 데자뷰(deja vu)속의 요트

어니스트 해마선소 2006. 11. 29. 23:21

요트부에 들어가서 OK딩기라는 요트를 처음 소개받았을때 

그 이름과 외관이 내게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그 이유를  찿는데도 별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케이 딩기를 처음 만난때가 1984년 이니까...그보다 10여년전쯤 나의 국민학교 3~4학년때의

"어떤 "기억이 금방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참,,인생의 복선이란...쩝.

 

나는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육영재단에서 시골학교 학급당 1권씩 무료로 나눠주던 '어깨동무'라는

어린이 잡지의 중독적 광팬이었다.

그 어깨동무 잡지를 통해 책읽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다음 달 잡지가 언제 도착하나를 애타게

기다리며 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하여튼, 그 어깨동무 잡지속에서 나는 오케이 딩기를 보았다.

충남 대천인가 어디에서 여름철 요트대회가 열렸는데,

그 동네의 꼬마아이들이 백사장에 계류된 요트에 놀러와서 선수들과 어울려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 밑에는 " 형! 나도 오케이딩기를 타고 싶어요!" 이런 글까지 달려있는걸

10여년이 지났는데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쥑이는 기억력이다.

얼마나 많은 어깨동무 잡지를 봐왔는데..다른건 다 잊혀졌고 오케이딩기만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요트로 인한 내 인생의 지랄같은 꼬임은 이미 그 뿌리가 상당히 깊었나 보다.

그러니 실물로 처음만난 오케이딩기는 내게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오케이딩기는 70년대부터  1인승 딩기의 대표격 지위를 유지해오다가,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레이저(Laser) 클라스의 보급으로 인해 한물 간 클라스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우리때 까지만 하더라도 (막 레이저로 전환되던 시대이긴 했지만), 뒷방 신세의 오케이딩기를

만만히 보지는 않았다.

오케이딩기에는 우리 이전 세대들의 권위가 아직 숨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1인승 딩기에는 어떤 권위와 카리스마가 선체에 스며있다. 

요트부에 입문하여 힘든 노예생활 1년을 보내는동안 (이름도 없다. 노예명이 있을뿐,,청소와 조리,

온갖 잡역만 맡아하며, 크루(crew)역할만으로 1년을 보내며, 2학년이 돼야 본명을 되찿으면서  스키퍼(skipper)를 할수있다)

 선배들은 재목감이 될만한 녀석이 있는지 눈여겨 살펴본다.

즉, 1인승 딩기의 스키퍼는..1학년 노예들중 가장 쓸만하다고 선배들이 평가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리인것이다.(물론 1인승이 적합한지 2인승이 적합한지의 인성과 신체조건에대한 평가도 중요 고려사항이다)

그래서 그들의 요트엔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깐깐함이 있다.

 

다행히 내가 2학년이 되면서부터 오케이딩기는 경기종목에서 제외되었기때문에 부담없이

즐길수 있었지만,,....

아래 사진의 오케이딩기는 학교에서 요트부 선배들이 자작한 합판정으로서 볼수록 매력이 있었다.

 

 

배라는게 꼭 예술적으로 만들어야만 아름다운것은 아니다.(상품으로서는 중요한 사항이겠지만).

위의 오케이는 물 밑 부분의 바텀은 제작과정의 실수로인해 좌우가 비대칭으로 만들어졌다.

배를 엎어놓고 보면 비대칭이 현저하다. ㅋㅋ

그걸 보면서 우린..."한쪽 택(tack)에서 까먹은 속력을, 반대쪽 택으로 달릴땐 2배로 보상받는다"며

농담을 하면서 웃곤했다.

그런 헐의 비대칭조차 멋있었고 정감가는 것이었다.

허름해서 더 편해보이는  목조정의 분위기와, 1인승 딩기치고는 볼륨이 상당히 큰 편인 오케이딩기

선체는 레이싱 딩기라기보다는 일인승 크루저를 타는 넉넉한 기분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나는 목조정 오케이딩기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만큼 오케이딩기에대한 애정이 강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