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잡담

다큐영화 그리즐리 맨 (Grizzly man)과 단독세계일주 요트항해자들..

어니스트 해마선소 2009. 9. 29. 01:27

 

 

 

 

*영화 그리즐리 맨은 EBS 교육방송의 국제다큐영화제 프로에서 9월 26일 심야에 방송되었습니다.

이리저리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도저히 채널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더군요.

위의 포스터 한장이, 그리고 그속의 카피 문구가  영화의 모든것을 말해 줍니다.

 

"자연계에는 동물들간에 서로가 넘어선 안될  경계(영역)가 있다"

 

이 다큐영화는 동물들간에 넘어선 안될 경계를 초월하고자 했던, 특히 알래스카 회색곰(그리즐리)의

생태보전과 보호에 생명을 바친 극단적인 동물보호주의자 티모시의 삶에대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카피에서처럼 티모시는 오랜기간동안 회색곰과 알래스카의 자연을 극단적으로 사랑했고,

스스로 회색곰 세계의 일원이 되기를 바랬지만...어느날 갑자기 곰의 습격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가 죽기직전까지 촬영 해 놓은 생생한 영상기록들을 기반으로 영화가 완성되었기에

우리들은 우리의 목숨을 걸지않고도 회색곰의 모습과 생태를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볼수있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BBC방송의 고성능 카메라보다 훨씬 생생하고 근접촬영 된,,

그것은 한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한 영상들입니다.

바로 그것때문에 저는 티모시가 가진 바깥세상과의 불화(不和)나 적대감, 그가 지닌 인간적 결점, 야생동물에대한 과도한 인격화...등등의

불편하고 껄끄러운 진실들은 애써 외면 해 가면서 봤습니다.

 

어쨌든간에...

그만큼 알래스카 회색곰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또 그들과 더불어 10년이상을 살아 간 사람은 없었고.

그리고 그에 의해서 우리들은 동물과 사람간의 경계선이 거의 허물어진 야생의 세계를 ,,아무런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안방에서 편안히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10여년의 세월을 압축해서 말이죠.

 

저기..

영화 포스트 속의 포효하는 거대한 회색곰을

남대양의 '포효하는 남위40도 해역(roaring forties)'이나 '절규하는 남위60도 해역'과  대치시켜 보면

단독세계주항을 떠나는 요트맨이나 영화속의 티모시나,, 둘 다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거부하고 경고하는 경계선을 넘어 서 버린 사람들이고

경계선 너머의 삶을 지독하게도 사랑했던 사람들 입니다.

 

세계주항을 떠나는 요트맨들 역시..

일상적 안정과 일상의 경계선이 유지되길 바라며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가끔 불편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리처드 핸드슨(Richard Handerson)이 'Single-Handed Sailing'이란 책에서,

대양으로 단독항해를 떠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심리적 동기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지만,

그들이 대양으로 떠나야 하는 수많은 이유, 즉

그것이 명예욕이든...(이게 없다고 말하면 내숭이겠고)

애국주의(내셔널리즘) 이든....(영국의 로빈- 녹스- 존스톤 같은 세계주항자의 경우)

학문적 호기심에의한 가혹한 실험이든...프랑스의 의사 봉바르(Bombard)의 표류실험.

대양에 대한 경외심 (The Mother Sea)에 따른 일종의 종교적 귀의 든...

숨막히는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도피(escapism) 이든...

하다못해,,

자신이 모든것을 결정하고 해결해야하는, 대양에서의 진짜 주체적인 삶에대한 자기만족이든...

'TV나 보고 잔디나 깎으며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따분한 세상'에 대한 경멸 때문이든...

이유가 뭐든 간에,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겐 얼마나 소중한 가치이건 간에,...

영화속 티모시가 세상사람들로부터 받은 경멸과 냉소를 세계주항자 요트맨들들도 한번쯤은 받을

각오를 하고 떠나야 할 겁니다.

 

경계선은 자연계에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사회와 사람들의 일상적인 인식 사이에도  존재하는 거니까....